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늑대와 향신료/실제 중세시대와의 비교 (문단 편집) === 물품 === * 작중에서 [[종이]]로 막혀있는 창문들이 등장하는데, 실제 중세시대에는 [[유리]]로 된 창문은 중세 후기에 귀족들의 집에서나 볼수가 있었다. ||||{{{#!wiki style="margin:10px" {{{-1 벽에 창이 있기는 해도, 큰 상회들처럼 유리가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창틀에 기름 먹인 마포를 달아 놓은 것 뿐이다. }}}}}} ---- {{{#!wiki style="margin:10px" {{{-2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p.157}}}}}} || ---- ||||{{{#!wiki style="margin:10px" {{{-1 하층 계급에서는 창문을 기름 수건이나 헝겊이나 종이로 막았지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 귀족들의 집은 채색한 유리창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 ---- {{{#!wiki style="margin:10px" {{{-2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 ---- * 작중 [[플레이트 아머|전신 판금갑]]이 등장하고[* 작중 묘사로는 그냥 "철갑옷"이나 삽화는 영락없는 [[플레이트 아머]]다.] 그 값어치가 비싸다는 대목이 나온다. 전신 판금갑의 경우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만큼 귀족만이 입을수 있을 정도로 비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민들이 사입기엔 가격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wiki style="margin:10px" {{{-1 젊은 시절 이 몸의 목숨을 지켜 준 철갑옷엔 얼마만 한 가격이 매겨지려나?" [[맨앳암즈|무공을 꿈꾸며 집을 떠난 젊은이]]가 기사가 될지 산적이 될지는 철갑옷을 맞추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정도로 고가(高價)이고, 걸치기만 해도 신분이 갈리는 왕의 외투와 매한가지다. }}}}}} ---- {{{#!wiki style="margin:10px" {{{-2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7)』''', 서울, 학산문화사.}}}}}} || ---- ||||{{{#!wiki style="margin:10px" {{{-1 뿐만 아니라 [[갑옷]], [[방패]], [[창]], [[칼]] 등을 비롯한 각종 무기들도 모두 자기 돈으로 구입해야 했어요. '''철제로된 갑옷은 모두 수제품으로, 여기에 [[호버크]]라고 불리는 보호장비 등을 갖추려면 요즘돈으로 수천만원 이상이 들었어요.''' 칼, 창 같은 공격용 무기들은 이와 별개로 추가 구입해야 했죠. 물론 많은 경우엔, 기사 개인 뿐 아니라 가문에서 그 비용을 도와주긴 했지만 말이죠. }}}}}} ---- {{{#!wiki style="margin:10px" {{{-2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mcate=M1022&nNewsNumb=20140113786&nidx=13787|이범진 기자의 잉글랜드 문화사 - 기사가 되는데 필요한 사교육비는 얼마?]]'''}}}}}} || ---- * 작중에서 호로에게는 새 옷을 선물해주면서 상당히 비싸다는 언급을 하고, 반면 자신은 북쪽 추위를 이기기 위해 허름한 헌 옷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시대에는 새 옷은 귀족들이나 입는 물건이었다. 당시 도시민들의 경우 귀족들이 입다 버린 헌 옷을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중세에는 왕이나 귀족이 입다 버린 헌옷을 수선해 판매하는 헌옷 장수가 있었다. 이들은 깨끗한 옷보다 찢어지거나 얼룩이 묻은 옷을 더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수선을 통해 자신만의 디자인을 새겨넣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디자인뿐 아니라 누가 입었는지가 인기의 척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농민들은 도시민보다 더욱 열악해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바지]]는 반바지에 [[스타킹]] 같은 바지를 입었다.[*출처9] 그렇기에 호로가 로렌스가 힘겹게 모아 산 옷을 날려 먹고 이후에 값비싼 옷을 입을 수 있던 것도 로렌스의 배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토트 콜]]의 경우 옷을 사주지 않고 기워 입으라고 실을 사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다만 이때 로렌스는 실을 살 돈으로 콜에게 더 나은 외투를 사줄 수 있었으나, 콜이 마을을 떠날 때 가져온 추억의 물건이 수선용 실보다 싸다는 것에 마음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그냥 실을 사줬다] ---- {{{#!wiki style="margin: 24px 0 0 16px; float: right; width: 35%; max-width: 600px; font-size: .9em" [[파일:external/www.livescience.com/medieval-books.jpg|width=100%]][br] 중세 시대 서적들 }}} * 작중에서 호로가 책을 빌려 볼 때 로렌스가 가죽으로 덮개를 만든 책은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14세기까지는 책은 굉장히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종이]]뿐 아니라 [[양피지]]도 상당히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종이가 본격적으로 민간에 보급된 시기는 15세기부터였다.] 책은 [[그리스도교]]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이슬람]] 도시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출처1] 그 때문에 수입하기가 굉장히 힘들었기에 저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런 책들은 성직자들이나 귀족들 정도가 되어야 보유할 수 있었다. 서양화에서는 초상화를 그릴때 주인공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재산도 같이 그렸는데 책도 엄연히 재산 중 하나로서 그려지곤 했다. ||||{{{#!wiki style="margin:10px" {{{-1 [[양피지]] 책 1권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약 [[양(동물)|양]] 300두가 필요했다. (중략) 책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어서, 1047년 어떤 [[수도자]]는 책 1권을 잘 가꾼 포도밭과 바꾸었고, 15세기 [[독일]]에서는 설교집 1권이 양 200마리와 수십 가마의 [[호밀]]과 바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 {{{#!wiki style="margin:10px" {{{-2 '''『구텐베르크의 귀환 : 출판문화의 re-르네상스를 위한 성찰』'''}}}}}} || * 또한 모든 사람이 [[의무교육]]을 받고 대부분이 [[대학]] 공부를 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달리, 당시 교육은 정말이지 극소수 1%의 특권이었고, 오늘날과 같은 [[학교]] 교육도 보편화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없는 무지몽매한 상태였다. ||||{{{#!wiki style="margin:10px" {{{-1 상인이라면 철학적인 책에는 투자해선 안 된다. 책들은 오직 현자와 학자만이 구매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 {{{#!wiki style="margin:10px" {{{-2 '''『컨스티블』, p.197'''}}}}}} || * 종이와 양피지 값만 비싼 것이 아니라, [[제본]] 과정도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려웠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손으로 직접 복사하는 필사본이 대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제작이 제한적이며 수량 또한 대중화 되기엔 크게 적었다. ||||{{{#!wiki style="margin:10px" {{{-1 [[중세]]시대의 [[제본]]생산은 무척 비싼과정이었다. [[15세기]] 중엽 활자의 발명까지 중세 제본 생산은 필경으로 생산되었다. 반면 종이는 15세기에는 크게 일반화 되었는데 필사본은 그때까지 정성껏 준비된 동물가죽으로 알려진 양피지나 송아지 가죽이었다. [[제본]]공장은 이 시대에 걸쳐 발달했다. 앵글로-섹슨 시대에는 [[수도원]]이 제본 생산과 보관의 중심지였다. 1530년대 수도원 해체까지 수도원과 기타 종교 건물은 계속해서 책을 생산했지만, 14세기 초반부터는 특히 런던에 있어서는 상업적인 제본 사업이 생겨났다. 이 생산조직은 엉성하여 양피지 생산자, [[필경사]], 달필가, 채색자, 제본가와 같은 다양한 예술인 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들은 도시의 한 마을에 주로 살고 있었다. 책장수나 거래업자들은 책 생산에 협업하여 돈 많은 후원 자의 주문에 응했고 때로는 동일한 책의 한 절(折)이나 제본을 책임지는 여러 사람의 필경사에게 일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 가게들은 왕정의 관료들의 직업적인 필경 서비스에 응할수 있었다. (중략) 이 시대를 통하여 책 시장은 변화하였다. [[수도원]]과 기타 종교기관 그리고 왕정의 관료는 여전히 책 생산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앵글로-노르만 시대부터 책은 귀족이나 상류 사회를 위해서도 생산되고 있었다. }}}}}} ---- {{{#!wiki style="margin:10px" {{{-2 '''『영문학으로 본 중세시대』'''}}}}}} || ---- * 1권에서 로렌스가 호로에게 화폐 순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 "그러니까 사람들은 화폐의 변화에 지극히 민감해지지. 그야말로 저울과 안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변화도 큰 변화로 여길 만큼."이라는 말을 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wiki style="margin:10px" {{{-1 "[[화폐]]라는 건 말이지, 거의 [[신용]]으로 성립되는 거야. 화폐 속에 들어 있는 [[은]]과 [[금]]을 같은 무게의 은과 금의 가치와 비교했을 때, [[은화]]와 [[금화]] 쪽의 가치가 확실히 높지. 물론 가치는 아주 신중하게 정해지지만, 사실은 원래는 그 정도 값어치가 아닌 것에 가치를 매기는 거니까 그야말로 신용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화페의 순도 변화는 웬만큼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정확히 알 수는 없어. 환전상들도 분명하게는 몰라. 녹이지 않는 한은 알 도리가 없는 거야. 그런데 말이지. 화폐라는 게 그런 신용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거니까, 어떤 화폐가 인기를 모으게 되면 액면가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 일이 많이 생겨.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그리고 인기를 좌우하게 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이 은과 금의 순도 변화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화폐의 변화에 지극히 민감해지지. 그야말로 저울과 안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변화도 큰 변화로 여길 만큼." }}}}}} ---- {{{#!wiki style="margin:10px" {{{-2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144-145.}}}}}} || {{{#!wiki style="margin: 24px 0 0 16px; float: right; width: 35%; max-width: 600px; font-size: .9em" [[파일:external/historyofinformation.com/first_depiction_of_spectacles-tommaso_da_modena_1352.jpg|width=100%]][br] 『위고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다 모데나 作. 1352년. }}} 이때 언급되는 [[안경]]은 [[중세]] 중기에 처음 등장하는 물건으로 작중 모티브가 된 시대와 일치한다. 13세기경에 처음으로 제작된 이 안경은 14세기와 15세기를 거치며 유럽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현재까지 '''기록상으로 [[안경]]이 발명 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최초의 기록'''은 정확히 알수가 없다. [[로저 베이컨]]이 1268년에 "누구든지 수정이나 유리를 통해 글자나 작은 물체를 관찰하면, 그리고 그 수정이나 유리가 둥근 것을 자른 단면이고 그 볼록면이 눈 쪽으로 향하고 있을 경우, 글자는 훨씬 더 잘보이고 더 크게 보일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겨 안경의 개발자로 여겨지기도 하나, [[렌즈]]뿐 아니라 테두리까지 포함된 [[안경]]의 존재는 [[1305년]] [[2월 23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피사의 조르다노가 [[미사]] 도중 신자들에게 언급한 것이 <피렌체의 [[사순 시기|사순절]](Quaresimale Fiorentiono)>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안경이 그려진 가장 오래된 그림'''인 <위고 [[추기경]]의 초상>은 이로부터 50여년이 지난 1352년에 제작되었다. 실제로 안경을 착용하고 돌아 다닌 것이 확인이 된 것은 [[베니스]]의 뮤라노(Murano) 섬에서 연질 유리를 볼록 렌즈로 깎아 안경테두리에 결합해 끼고 다닌 것이었다.[[http://www.snm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6328|출처]] 그러나 이 시기 물건은 품질이 좋지 않았던 데다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아무나 사용하지 못했다. '''이런 안경의 주요 소비층은 성직자와 상인'''으로 공부 및 필사를 위해 독서용 안경을 낀 성직자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장부 기록을 위해 안경을 착용했다는 상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소수의 인원들이 착용했던 안경은 15세기 부터 렌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 지며 사용이 확산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근시]]를 위한 안경이 발명 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10px" {{{-1 "그래서 뭐, [[토트 콜|콜]]처럼 [[야훼|신인지 뭔지]]에게 기도하려고? 눈이 좋아지도록?" "아니지. 그래서 [[수도원]] 인거야." [[크래프트 로렌스|반려]]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게손가락과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눈에 갖다 댔다. "[[안경]] 말이야." "안경?"[* 다만 호로가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이 반응하는 부분은 옥의 티에 가깝다. 앞서 언급했듯이 1권에서 이미 로렌스가 호로에게 화폐의 순도를 설명하면서 [[안경]]을 언급했기 때문.] "여행하면서 어딘가에서 보여 준 적 없던가? 물 한 방울을 이파리 위에 떨어뜨리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모양으로 부풀잖아? 그런 모양의 유리를 가공해서 잘 갈아 낸 거야. 글자를 크게 확대해서 보이게 하거든. 부자 수도원에는 질 좋은 안경이 많이 있을 거야." 상상이 잘 가지 않지만, 반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 건가? 하고 맥 빠진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반려가 손가락으로 만든 동그라미를 내 눈에 갖다 댄다. "듣자 하니 이렇게 [[안경|눈에 대는 것도 있대]]. 이러면 유리가 커지니까 가는 비용도 껑충 뛰어 오르지만, 대신 세상은 자세히 보이게 된대." }}}}}} ---- {{{#!wiki style="margin:10px" {{{-2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9)』''', 서울, 학산문화사, p.260~261.}}}}}} || ---- ||||{{{#!wiki style="margin:10px" {{{-1 중세 시대 최초의 안경렌즈는 11세기경에 투명한 석영 또는 녹주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안경은 유럽 [[수도자]]들 사이에서 원고 읽는 것을 돕기 위해 처음 사용 되었습니다. 석영으로 만들어진 안경은 아라비아 천문과 수학자 Alhazen 이론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현재와 같이 눈에 직접 렌즈를 씌우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두 세기가 더 걸렸습니다. 그 후 1260년대에 리베트라는 광물로 안경렌즈를 만들었는데, 나무로 된 2개의 원형틀과 볼록렌즈를 못으로 연결하여 안경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안경은 팔을 움직이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용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서 안경착용은 지식인의 상징과 같아서 유명인의 초상화에는 비록 그들이 안경발명 이전에 살았을 지라도 종종 안경을 착용한 모습을 그리곤 했습니다. }}}}}} ---- {{{#!wiki style="margin:10px" {{{-2 [[니콘]] 공식 홈페이지. '''[[http://www.nikon-lenswear.co.kr/eyes-and-vision/history-of-spectacle-lenses1|흥미 있는 안경렌즈의 역사 2편 - 중세시대]]'''}}}}}} || ---- ||||{{{#!wiki style="margin:10px" {{{-1 안경이 발명된 이후에 놀라운 기술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유리 생산과 생산 공정의 기술적 완벽함이 직접적인 관련을 가졌기 때문이다. 13세기 말부터 안경이 확산되면서 특히 책을 읽는 독자층이 큰 헤택을 받았다. 반면 근시 수정을 위한 렌즈는 15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중략) 인위적으로 시야를 확대하는 것은 놀라운 발명이었다. 렌즈 제작은 문화와 학계 인물들의 활동을 위한 가능성 향상에 중요한 여정이었다. 게다가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지적이고 전문적인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후반부터 노안에 효과가 뛰어난 근시용 렌즈가 생산되었다. [[14세기]]에 접어들며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는 전 유럽을 대상으로 한 안경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 ---- {{{#!wiki style="margin:10px" {{{-2 '''『중세 3 : 1200~1400: 성, 상인, 시인의 시대』''' 中}}}}}} || ---- * 19권에서 [[맷돌]]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를 두고 "중세 유럽이 아니라 동양풍 아니냐?"고 반문 할수도 있다. 하지만 [[맷돌]]은 아시아권에서만 사용한 물건이 아니다. 곡물을 갈아서 섭취하는 문화는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존재했으며 이미 [[신석기]] 시대의 유물등을 보더라도 한국 전통적인 맷돌과 동일한 모양의 물건, 즉 Quern-stone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음을 알수가 있다. 이후 중세를 넘어 [[산업시대]]를 맞이하기 전까지 중세 유럽에서도 널리 사용된 물건으로 자세한 내용은 [[https://en.wikipedia.org/wiki/Quern-stone|영문위키]]나 [[http://m.blog.daum.net/pile55/8889952?np_nil_b=2|해당 포스팅]]을 참고하자. ---- * 18권에서 [[류트(악기)|류트]]를 연주하는 무희의 존재가 언급된다. 류트는 16세기 무렵부터 악보가 제작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이미 존재했던 물건이었고 위키백과에 의하면 중세 말기 및 [[르네상스]] 초기였던 [[15세기]]까지는 즉흥 연주에 사용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wiki style="margin:10px" {{{-1 아마도 [[중세 시대]] 류트의 주요 사용처는 [[반주]]였을 것이나, 1500년대 이전에 류트로 연주한 음악은 (현재까지) 온전히 남아서 전해진 것이 없다. 중세 및 초기 [[르네상스]]의 반주는 대부분 즉흥곡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한 이유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Song accompaniment was probably the lute's primary function in the Middle Ages, but very little music securely attributable to the lute survives from the era before 1500. Medieval and early-Renaissance song accompaniments were probably mostly improvised, hence the lack of written records. }}}}}} ---- {{{#!wiki style="margin:10px" {{{-2 영문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Lute|류트 항목]]''' 中}}}}}} || ---- * 케르베에서 키건과 [[에이브 볼란]] 사이의 사건에 휘말린 로렌스가 로엔 [[길드|상업 조합]]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때 편지에 새빨간 밀랍 인장이 찍혀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실링 왁스]]를 말한다. 특히 중세에 접어들어서 가문이나 길드의 [[문장(그림)|문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자신들이 보낸 [[공문서|공적인 문서]]들에 밀랍 혹은 [[바니시|셸락]]을 이용해 자신들의 문장을 새기는 일이 무척이나 흔했다. ||||{{{#!wiki style="margin:10px" {{{-1 값비싼 양피지를 나이프로 재단하여 내용을 기입한 후 [[모래]]를 뿌려 잉크를 말린다. 그 사이에 [[말총]]으로 만든 끈과 붉게 염색한 밀랍을 준빟나다. 잉크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양피지를 둘둘 만다. 녹인 밀랍으로 봉인하여 말총을 꼬아 만든 끈으로 묶으면 친서가 완성된다. (중략) "당신, 이런 게 왔는데?" 그러면서 호로가 로렌스를 향해 치켜든 양피지에는 한 눈에도 알 수 있는 인장이 찍혀있다. 로엔 상업조합의 조합인. [[실링 왁스|새빨간 밀랍]]으로 찍힌 그 인장이 악마의 서명으로 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 ---- {{{#!wiki style="margin:10px" {{{-2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8)』''', 서울, 학산문화사.}}}}}} || ---- * 작중 로렌스가 지도를 보면서 "도움이 되진 않지만, 있는 게 낫다"고 말한다. 이는 중세 당시의 열악한 지도를 묘사한 것이다.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지도 형태는 마파 문디(Mappa mundi)라 불리는 지도들이 대표적으로 당시 측량술의 부재, 열악한 교통망 등으로 인해 지도의 정확도가 높은 편이 아니었다.[[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11/2009091167003.html|주경철의 히스토리아(24) - 중세 지도]], [[https://tayler.tistory.com/671|중세의 지도들]] ---- * 17권 행상인과 잿빛기사 에피소드에서 부싯돌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 불을 붙이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wiki style="margin:10px" {{{-1 부싯돌을 연신 맞부딪쳐 튄 불꽃으로 [[불쏘시개|맨 처음 불을 지피는 것]]은 풀을 두드려 으깨 물에 빨았다가 다시 말린 뒤 헤쳐 놓은 것.[* 이렇게 불을 붙이기 용이하게 만든 촉매재를 "부시깃"이라고 부른다.] 그런 후 [[지푸라기]], [[장작]] 순으로 불을 옮겨 붙인다. }}}}}} ---- {{{#!wiki style="margin:10px" {{{-2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7)』''', 서울, 학산문화사.}}}}}} || ---- * 호로가 쓰는 [[빗]]이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 진 빗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 진 빗은 세계 각국에서 오래 전 부터 사용된 고급 물품으로 중세시대에도 부유한 이들이 주로 들고 다녔던 물품이었다.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주로 만들어 졌는데, 1973년부터 푸른바다거북의 포획이 금지되면서 현재는 플라스틱으로 모양만 비슷하게 만든 가품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조선시대에 제작된 [[http://www.gogung.go.kr/searchView.do?cultureSeq=5163|별갑(거북이 등껍질)으로 만들어진 빗]]이 전시 되어 있다. ||||{{{#!wiki style="margin:10px" {{{-1 "고맙습니다." 짤막하게 말한 뒤 곧바로 뛰어다. 상당한 금액의 청구서를 손에 쥐고, 로렌스는 있는 힘껏 달렸다. 손에 꽉 쥐어 구겨진 청구서에 적혀 있던 상품은 로렌스가 그렇게까지 할 만한 것들이었다. 날짜는 오늘, 청구한 곳은 파치오 시에 소재한 모직물상과 과일상. 그 내역은, 호화로운 여성용 [[로브]] 두 벌에 비단 허리띠, 여행용 [[신발]]과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빗. 그리고, 대량의 [[사과]]. 은화로 쳐서 140냥을 웃도는 그것들은[* 작중 트레니 은화 1냥을 아껴쓰면 1주일을 먹고 잘 수 있다고 했으니 140냥 이상이면(...)], 특히 사과는 도저히 손에 들고 운반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 ---- {{{#!wiki style="margin:10px" {{{-2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311.}}}}}}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